기업 간 거래에서 ‘시운전 완료확인서’는 단순한 문서가 아닙니다. 제품의 성능과 적합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그에 따라 대금 지급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죠. 이번 대법원 판결(2025. 3. 27. 선고 2021다242185)은 이러한 ‘확인서’의 의미와 함께 국제거래에서 준거법과 이행기 판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의 개요
국내 기업인 원고 회사는 러시아 법인인 피고와 2009년부터 일회용 면도기 부품 생산을 위한 사출성형기와 조립설비(이하 ‘이 사건 조립설비’)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장비를 인도했고, 2015년에는 미지급 대금에 대해 분할 지급 조건 등을 담은 ‘2차 부속계약’을 추가 체결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2차 부속계약은 제1회 대금 지급 시기를 “시운전 완료확인서에 서명한 날”로 명시했는데, 피고는 설비의 하자를 이유로 확인서 작성을 거부했고 결국 대금 일부가 미지급 상태로 남았습니다.
원심의 판단
원심(수원고등법원)은 다음과 같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원고의 청구를 인용했습니다.
- 세 차례에 걸친 시운전 실시
- 계약 해제나 감액 요구가 없었던 점
- 성능 미달의 주된 원인이 피고가 공급한 부품 때문인 점
- 설비가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
결론적으로, 설비의 하자가 경미하고, 본질적 성능을 충족하고 있다면 ‘시운전 완료확인서’ 작성 여부와 무관하게 대금청구권의 이행기가 도래했다고 본 것입니다.
대법원의 판단 – 핵심은 준거법
이번 판결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대법원이 사실관계뿐 아니라 국제거래에서 준거법의 적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는 점입니다.
✅ 1. 적용 법리는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UN 협약(CISG)’
- 대한민국과 러시아 모두 CISG 체약국이므로, 특별한 배제의 합의가 없는 한 이 사건 계약에는 CISG가 우선 적용됩니다.
- 원고와 피고는 별도로 다른 준거법을 선택하지 않았고, 소송 중 준거법에 대한 다툼이 없었다고 해서 CISG의 적용이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 2. 시운전 완료확인서 = 대금지급의 ‘조건’인가?
- 대법원은 이 사건의 대금 지급 시점을 피고가 임의로 통제할 수 있도록 구성된 조건부 계약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 설비가 계약상 성능을 갖추고 있고, 시운전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확인서가 없더라도 대금지급 의무는 발생합니다.
- 이는 CISG 제59조(지정 기일에 대금 지급 의무) 및 제60조(수령의무 및 협력의무)에 근거한 판단입니다.
결론 – 준거법을 무시한 판단이었지만, 결론은 정당했다
대법원은 원심이 민법 제150조를 유추 적용한 것에 대해서는 잘못된 법리 적용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최종 결론이 정당하다는 점에서 판결 자체는 상고기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블로그를 마치며
이 판결은 국제물품계약에서 CISG가 자동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계약서상의 문구보다 계약의 목적과 당사자의 실제 행위, 협약의 원칙이 더 중요한 해석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금 환기시켜 줍니다.
기업 간 국제계약을 체결하거나, 국제거래 분쟁을 검토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실무적인 교훈이 담긴 판례입니다.
변호사 이두철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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