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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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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두철변호사 2021. 1. 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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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Bertrand Russell 지음

송은경 옮김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양심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내 소신을 많이 바뀌었다. 세상에는 일이 너무나 많으며,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대 산업 국가에 필요한 설교는 지금까지 늘 해오던 것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을 벌어서 그 돈을 쓰고, 그 쓴 돈이 고용을 창출한다. 사람이 번 돈을 쓰고 사는 한, 돈을 벌 때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가져온 만큼의 빵을 돈을 쓸 때 사람들의 입에 넣어준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진짜 악당은 수입을 저축하는 사람이다. 방탕한 낭비를 하는 사람을 멍청하고 실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가 친구들에게 파티를 열어 주면서 돈을 쓴다면,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정육점 주인이나 빵굽는 사람, 양조업자 등 그의 돈이 쓰여지는 곳의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수도 있다.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둘째, 타인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 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고, 그뿐 아니라 무한한 확장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의 일에 요구되는 능력은 설득력 있는 말하기와 글쓰기이다.

 

나아가 제3의 계층도 존재한다. 바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은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모든 신조가 생겨난 뿌리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기근이 닥칠 때는 전혀 잉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굶어 죽는 반면, 전사와 사제들은 평상시처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생산량이 급증하고 자본가라는 신흥 계층이 권력을 획득한 후에야 위와 같은 체제가 종식될 수 있었다. 현대의 기술은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여가를 선물해 주었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원시 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 되는 잉여를 전사나 사제들에게 나눠 주기보단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에게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그러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졌고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인류 전체의 이익은 동일하다고 어거지로 믿음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이 사실을 은폐한다. 그러한 믿음이 진실인 경우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노예를 거느렸던 아테네인들은 여가의 일부를 바쳐 영원히 문명에 남을 공헌을 했다. 공정한 경제 체제하에서였다면 그 같은 공헌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 다윈 같은 사람이 하나 나왔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여우 사냥이나 하는 시골 신사들이 수만 명이나 있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현대 세계는 노동력 중의 작은 일부만으로도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지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일하는 사람은 장시간 일을 해야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기 없어 굶어죽게 방치된다. 왜냐구? 일은 의무이므로, 사람은 그가 생산한 것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미덕에 비례해 임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예 국가의 도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겨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든다.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이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하루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낸다. 그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선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론 팔 수도 없다. 과거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은 직장에서 내쫓기게 된다. 인력의 절반은 완전히 손 놓고 노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과로로 시달려야 한다. 이때 지각 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보두 종전처럼 잘 굴러갈 것이다. 결국 모두 4시간씩 일하면 되고 4시간의 여가가 창출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겐 언제나 충격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남자의 평일 근로 시간이 15시간이었다. 아이들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고 어른만큼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 시간이 약간 긴 것 같다가는 의견을 제기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일이 어른들에겐 술을 덜 마시게 하고 아이들에겐 못된 장난을 덜 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도시 근로자들이 막 투표권을 따낸 직후였는데 몇몇 공휴일이 법으로 정해지자 상류층에서 대단히 분개했다. 나는 한 늙은 공작부인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난뱅이들이 휴일에 뭘 한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구.”

 

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 그 일 자체를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진지한 사람들은 영화 보러 가는 습관에 대해 비난하면 그런 버릇은 젊은이들을 범죄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노동은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기 때문에, 또한 돈을 벌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다.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란 말이다. 열쇠는 선이고 열쇠 구멍은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용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이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 도시 사람들의 여가활용은 대체로 수동적이다. 영화를 보고, 축구 시합을 관람하고, 라디오를 듣는 식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가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화가들이 배곯지 않고 맘껏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러할 때 그의 그림은 더욱 탁월할 것이다. 젊은 작가들은 굳이 경제적 독립을 얻기 위해 자극적인 작품을 쓰지 않을 것이다. 직업인은 남는 시간에 학문과 교류하여 자신의 생각과 능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이므로 전쟁 취미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도적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끝.

 

※ 위 글은 1932년 발표되었습니다. 원문과 송은경 님의 번역본을 읽고 갈무리하였습니다. 90년 전 글이지만, 로봇•인공지능 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울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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